사과를 떠올려보세요… 아무것도 안 떠오른다면? 아판타시아

2025. 4. 11. 07:00양탱 실험실

 

아판타시아: 머릿속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

눈을 감고 빨간 사과를 떠올려 보세요. 어떤 분은 사과의 윤기와 색감, 질감까지도 생생하게 그려지실 겁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머릿속에 그 어떤 이미지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상태를 '아판타시아(Aphantasia)'라고 부릅니다.


◆ 아판타시아란?

아판타시아는 머릿속으로 이미지나 장면을 상상하는 '심상 능력(Mental imagery)'이 결여된 인지 특성을 말합니다. 즉, '무언가를 떠올려보라'는 요청에 시각적으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2015년, 영국의 신경과학자 애덤 젬먼(Adam Zeman)이 본격적으로 소개하며 학계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외상 후 갑자기 상상이 불가능해진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이 현상의 실존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냈습니다. 이후 연구자들은 아판타시아가 단순히 상상력의 차원이 아니라 인지 처리 방식의 큰 다양성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 중 약 2~5%가 아판타시아일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자신의 인지 방식을 '정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자가진단은 가능할까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나요?
  •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바닷가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시나요?
  • 글을 읽을 때 장면이 눈에 보이듯 그려지시나요?

이러한 질문에 대부분 '아니오'라고 답하고, '느낌은 있지만 그림처럼 떠오르지는 않아요'라고 느낀다면 아판타시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판타시아의 특징은 감각 자극에 대해 인식은 하지만, 그것을 뇌 안에서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 자체가 낮거나 없는 경우입니다. 즉, 시각적 연상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나 감성 표현, 사고력 면에서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특정 분야에서는 더욱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보이기도 합니다.


★ 병일까요? 아니면 다름일까요?

아판타시아는 질병이나 장애가 아닙니다. 단지 인지 스타일의 차이일 뿐입니다.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능력이 부족할 수는 있지만,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이 발달한 경우도 많습니다. 언어나 수리 논리, 체계적 사고 등에서 강점을 보이는 사례도 있습니다.

실제로 과학자, 수학자, 작가들 중에도 아판타시아를 가진 사람이 많으며, 현대에는 일론 머스크도 아판타시아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BBC에서는 아판타시아를 주제로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수많은 창의적인 사람들이 이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 불편한 점도 있나요?

있습니다. 주로 예술적 활동이나 창작, 감각 연상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불편함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 꿈의 장면을 시각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든가,
  • 독서 중 장면 몰입이 어렵다든가,
  •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창작이 어려운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일상 속에서도 누군가의 설명을 이미지화하지 못해 학습 속도가 더딜 수 있으며, 감정 표현에서 '그림으로 느끼는' 공감 경험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감정에 덜 휘둘리고 논리적인 사고를 잘하며, 과도한 감각 자극으로 인한 피로도가 낮은 장점도 있습니다.

특히, 이미지 기반의 트라우마나 끔찍한 장면을 덜 생생하게 기억하는 특성 덕분에 정신적으로 더 안정감을 느낀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 시각 중심 사회와 아판타시아

현대 사회는 시각 정보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광고, 영상 콘텐츠, SNS까지 모두 '이미지를 상상하고 공유하는 능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아판타시아를 가진 분들은 종종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아판타시아는 결핍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기억하며 표현합니다. 시각적이지 않아도 감정을 느끼고, 창의성을 발휘하며, 지식을 쌓아가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최근에는 학계에서도 아판타시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를 사회적 다양성의 한 예로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움직임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 현장에서 다양한 인지 방식을 고려한 커리큘럼 개발, 직장 내 인지 스타일 차이에 대한 이해 증진 활동 등이 그 예입니다.


▶ 마무리하며

아판타시아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그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장됩니다. 만약 주변에 상상을 어려워하는 분이 있다면, “왜 못해?”라는 반응보다 “아,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구나”라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뇌는 단 하나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지로, 어떤 사람은 언어로, 어떤 사람은 감정으로 세상을 구성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르지만 모두 정답입니다.

다양한 인지 방식이 공존하는 사회, 그것이 건강한 사회 아닐까요?